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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공간성을 고민하다, 미개봉, 미개봉 지원 독립영화의 힘 - <공원에서> <지난 여름> <나선의 연대기> <잠자리 구하기>
来源:3377TV人气:289更新:2024-11-08 18:30:03
올해 서울독립영화제에 출품된 장편영화는 199편이다. 한해에 만들어지는 국내 장편 독립영화의 수가 200편 내외라고 가늠할 수 있다. 이중 극히 일부만이 영화진흥위원회 등의 개봉지원을 받아 극장에 걸린다. 개봉지원을 받지 못한 대개의 독립영화는 유수의 영화제를 순회하며 호평받았더라도, 일부 관객의 큰 감응을 불렀더라도 더 많은 이들과 극장에서 만날 수 없다. 극장뿐 아니라 언론매체를 통한 관객과의 만남도 적을 수밖에 없다. 영화가 만날 수 있는 관객이 제한적이다보니 영화에 대한 담론 역시 활발하게 형성되기 어렵다.
그럼에도 극장개봉이란 산업의 제도권 바깥에서 영화의 가능성을 넓히려는 시도가 꾸준히 발견되고 있다. 이중에서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여러 영화제에서 관객을 만나고 수상한 손구용 감독의 <공원에서>(부산국제영화제 상영 등)와 최승우 감독의 <지난 여름>(무주산골영화제 영화평론가상 등), 김이소 감독의 <나선의 연대기>(전주국제영화제 상영 등) 등이 보여준 영화의 미학적 가능성을 소개하고자 한다. 한편 개봉지원을 받진 않았으나 배급사가 자체 개봉을 택한 홍다예 감독의 <잠자리 구하기>처럼 사실상 개봉의 제도권에서 탈락한 일군의 작품들(이후 기사에서 다룰 <열 개의 우물>을 포함하여)도 있다. 이러한 탈락이 결코 이 영화들의 결락을 의미하진 않는다. 특히 위 네 작품은 영화가 현실의 대안적 공간이 될 수 있다는 신선한 논지를 펼치며 그 공간성이 영화매체의 존재론적 위기까지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주는 귀한 경우다. 그 귀한 사례들을 소개한다.
이야기를 거부하는 공간들
<공원에서>
<공원에서>와 <지난 여름>은 각각 어떤 공원과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삼지만 그곳의 장소성을 깨끗이 소거함을 통해 순수한 영화적 공간의 형성이 아직 가능함을 입증한다. <공원에서>는 흑백의 스크린 위로 한 공원의 나무, 분수, 그루밍하는 고양이, 물고기, 곤충, 하늘, 책 읽는 여자, 서성이는 남자 등의 모습을 수없이 교차하며 영화를 지속한다. 그러나 이 요소들 사이의 연관성이나 서사적 가능성은 없다. 마주침도 응시도 대화도 없다. 공간 사이에 어떤 길이 나 있는지, 공원 전체의 조감도가 어떻게 형성되어 있는지조차 알 길이 없다. 즉 <공원에서>는 하나의 이야기나 공간을 다수의 숏으로 나누는 과정, 즉 고전적 데쿠파주의 방법론과 서사의 시퀀스화를 말끔히 거부하며 대안적 세계를 꿈꾼다.
영화는 공간의 구체적 식별과 이야기를 거부하는 데 멈추지 않는다. 영화는 나무, 분수, 고양이, 물고기, 곤충, 하늘, 책 읽는 여자, 서성이는 남자의 비슷한 행위나 모습을 계속하여 보여주는데, 사실 여기엔 같은 푸티지가 사용되지 않았다. 관객은 자연스레 아까의 고양이가 지금의 고양이가 아닌지 맞는지를, 혹은 이곳의 시간이 흐르고 있는지를 1시간30분 내내 고민하며 존재론적 호기심과 시간의 어지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일상에선 느낄 수 없는 시공간의 현기증을 스크린에 펼치는 것이다.
<지난 여름>은 <공원에서>보다 일반적 극영화의 양태를 띠고 있는 듯하면서도 역설적으로 더 기묘하게 고전적 데쿠파주를 탈피한다. <장손>이 한국 시골의 전통적인 대가족을 스크린에 투사한다면, <지난 여름>은 한국 시골의 탈역사적 풍경을 찍는 데 집중한다. 주인공 민우와 아버지, 할머니가 영화에 종종 등장하여 시골의 평범한 일상과 죽음을 담아내지만 기실 대개의 장면은 별 의미 없는 시골 주민들의 평평한 일상에 할애된다. 이들의 일상은 어떠한 사건을 촉발하지도 않고 서로에게 큰 영향을 주지도 않는다. 공간성 역시 독특하다. <지난 여름>의 공간들은 문을 매개하여도 각 공간의 안팎이 완전히 분리된 세계로 설정된다. 사람들이 각 공간의 경계(문)를 이동하는 이미지가 쉽사리 등장하지 않고, 혹여 누군가가 문으로 들어가더라도 그 인물의 행위는 그 안에서 연속되지 않고 금세 종료돼버린다. <공원에서>와 마찬가지로 이야기의 의도적 집합이나 연속이란 전통적 시퀀스 개념을 거부하고 모든 공간을 개별로 분화하여 영화의 고전적 데쿠파주를 해체한다.
통상적 극영화의 맥락에서 벗어난 <공원에서>와 <지난 여름>은 인간 기준의 보편적 지각을 넘어 세계의 존재 방식에 가까운 탈인간적 풍경을 그려낸다. <그녀에게> 등 앞서 살펴본 일련의 독립영화에서 우리 사회에 보편화되어야 할 주제와 관용의 필요를 발견할 수 있었다면, 극장 바깥의 몇몇 독립영화에선 그 사회 바깥에 흐르는 현상으로서의 세계를 곰곰이 살피는 사유에 도달하는 일이 가능해진다.
영화의 영토를 넓히는 새로운 가능성
<잠자리 구하기>
“일반적으로 헤테로토피아는 보통 서로 양립 불가능한, 양립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 여러 공간을 실제의 한 장소에 겹쳐놓는 데 그 원리가 있다.”(<헤테로토피아>, 미셸 푸코)
세계를 곰곰이 살피는 사유, 이것이 가능한 곳으로 미셸 푸코는 ‘헤테로토피아’란 개념을 제시했다. 가상의 이상적 공간인 유토피아와 달리 이상적이되 현실에 존재하는 반(反)공간을 뜻한다. 우리의 일상에 속하고 언제나 우리 주위에 있되 쉬이 지속될 수 없는, 하지만 그곳에 갈 수만 있다면 우리의 일상적 공간에 대한 신선한 사유를 얻을 수 있는 곳이다. 푸코가 예로 든 현대의 헤테로토피아는 극장이었다. 이차원의 공간에 삼차원의 공간을 영사함으로써 온갖 장소들이 혼재하는, 현실과 완연히 다른 감각을 제공하는 공간으로 극장이 기능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극장은 빛이 차단된 블랙박스다. 어두운 곳에선 밝은 곳을 볼 수 있지만 그 반대는 어렵다. 요컨대 <공원에서> <지난 여름>은 실제의 빛이 닿지 않는 깊은 동굴(영화)에서 바깥의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순수한 사유의 지대를 제공한 셈이다. 각 영화가 택한 공원과 시골이 영화관의 흥미로운 비유로 이해된다. 푸코가 “‘정원’은 세상 전체가 상징적 완벽성을 얻게 되는” 공간임을 주장한 것 역시 <공원에서>의 공간 선택과 즐겁게 공명한다.
영화의 헤테로토피아화는 작금 독립영화의 곳곳에서 발견되는 뚜렷한 경향이다. 극장이란 공간의 존재론이 위기에 처한 지금, 다수의 영화가 영화의 공간성을 고민하는 것이 우연은 아닐 테다. <잠자리 구하기>의 학교가 그렇다. 영화의 감독이자 주인공인 홍다예 감독은 고등학생 시절 입시 지옥을 선사했던 학교의 정경을 “차가운 포용력”이라 정의한다. 이처럼 모순적인, 말 그대로 이상적이되 현실에 존재하지 않을 듯한 수사는 무슨 의미인가. 학교란 헤테로토피아는 우리의 일상에 속해 있되 영화적 재현을 통해 숙의하여 그 이미지를 되새긴다면 무척 새로운 감상을 불러일으키는 곳이 된다. 학창 시절 겪었던 사회체제의 부조리한 구조를 재차 실감함과 동시에 이상하게도 그곳을 그리워하는 노스탤지어의 감정적 원천까지 이끌 수 있는 반(反)공간, 영화라는 이름의 이중적 헤테로토피아.
김이소 감독의 <나선의 연대기> 역시 화이트 큐브라는 전시관의 기본적 형태를 작품의 자장 안으로 끌어옴으로써 영화 공간의 헤테로토피아적 성질을 드러낸다. <나선의 연대기>는 2006년 일어난 평택 대추리의 농민 탄압 사건을 재현하려 여러 시도를 곁들이는데, 그중 하나는 당시 농민들의 항거 행위를 퍼포먼스적 몸짓으로 재현하는 일이다. 퍼포먼스는 벽면이 새하얀 어느 방에서 일어나고 주인공은 그들의 몸짓에 손전등의 빛을 투과하여 직시하게 된다. 화이트 큐브와 극장이란 블랙박스의 성질을 혼재함으로써 우리가 상상할 수 있고 갈 수도 있되 완연히 새로운 지대를 구현했다. 영화의 재현 가능성을 더욱더 넓힐 수 있는 여지를 펼쳐낸 셈이다. 다시, 어둠 속에서 바라보는 빛. 영화매체와 극장이 그 외연의 경계를 잃어가는 작금에 외려 영화의 영토를 넓힐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이 여기 있다.
개봉 제도 바깥에서의 발견
<나선의 연대기>
일일이 나열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영화적 시도, 특히 형식적인 실험의 장은 극장 바깥의 독립영화에서 활발히 펼쳐지고 있다. 서두에 언급한 200편의 영화 중 개봉뿐 아니라 영화제라는 제도에서 탈락한 영화의 수까지 고려한다면 우리가 놓치는 영화는 더욱 많을 것이다. 습관처럼 회고되는 과거 독립영화의 생기라든지 힘이라든지 특별함, 사유의 깊이 등은 어쩌면 개봉이라고 부르든 제도라고 부르든 현재의 시스템에서 받아들여지는 데 실패했을 뿐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독립영화의 다양성이란 테제와 그것을 둘러싼 정책적 기준은 기획서 단계의 소재, 주제, 서사뿐 아니라 텍스트로 모두 설명하기 어려운 형식미를 포괄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지금 한국의 독립영화, 영화산업의 개봉 제도는 피칭부터 제작 지원, 개봉지원에 이르는 일련의 ‘텍스트적 검증’에 의존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독립영화의 영토가 제한되는 과정을 거쳐야 관객을 만날 수 있는 시스템하에 우리가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를 감추기 어렵다. 그럼에도 전술한 <공원에서> <나선의 연대기>는 오는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잠자리 구하기>는 현재 각지의 독립영화관에서 만날 수 있다. 조금만 눈을 돌리면 관객을 기다리는 독립영화가 있다. 그 지평으로 향하는 문을 열면 당신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기다려왔던 열린 감각의 시공간(들)을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극장개봉이란 산업의 제도권 바깥에서 영화의 가능성을 넓히려는 시도가 꾸준히 발견되고 있다. 이중에서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여러 영화제에서 관객을 만나고 수상한 손구용 감독의 <공원에서>(부산국제영화제 상영 등)와 최승우 감독의 <지난 여름>(무주산골영화제 영화평론가상 등), 김이소 감독의 <나선의 연대기>(전주국제영화제 상영 등) 등이 보여준 영화의 미학적 가능성을 소개하고자 한다. 한편 개봉지원을 받진 않았으나 배급사가 자체 개봉을 택한 홍다예 감독의 <잠자리 구하기>처럼 사실상 개봉의 제도권에서 탈락한 일군의 작품들(이후 기사에서 다룰 <열 개의 우물>을 포함하여)도 있다. 이러한 탈락이 결코 이 영화들의 결락을 의미하진 않는다. 특히 위 네 작품은 영화가 현실의 대안적 공간이 될 수 있다는 신선한 논지를 펼치며 그 공간성이 영화매체의 존재론적 위기까지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주는 귀한 경우다. 그 귀한 사례들을 소개한다.
이야기를 거부하는 공간들
<공원에서>
<공원에서>와 <지난 여름>은 각각 어떤 공원과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삼지만 그곳의 장소성을 깨끗이 소거함을 통해 순수한 영화적 공간의 형성이 아직 가능함을 입증한다. <공원에서>는 흑백의 스크린 위로 한 공원의 나무, 분수, 그루밍하는 고양이, 물고기, 곤충, 하늘, 책 읽는 여자, 서성이는 남자 등의 모습을 수없이 교차하며 영화를 지속한다. 그러나 이 요소들 사이의 연관성이나 서사적 가능성은 없다. 마주침도 응시도 대화도 없다. 공간 사이에 어떤 길이 나 있는지, 공원 전체의 조감도가 어떻게 형성되어 있는지조차 알 길이 없다. 즉 <공원에서>는 하나의 이야기나 공간을 다수의 숏으로 나누는 과정, 즉 고전적 데쿠파주의 방법론과 서사의 시퀀스화를 말끔히 거부하며 대안적 세계를 꿈꾼다.
영화는 공간의 구체적 식별과 이야기를 거부하는 데 멈추지 않는다. 영화는 나무, 분수, 고양이, 물고기, 곤충, 하늘, 책 읽는 여자, 서성이는 남자의 비슷한 행위나 모습을 계속하여 보여주는데, 사실 여기엔 같은 푸티지가 사용되지 않았다. 관객은 자연스레 아까의 고양이가 지금의 고양이가 아닌지 맞는지를, 혹은 이곳의 시간이 흐르고 있는지를 1시간30분 내내 고민하며 존재론적 호기심과 시간의 어지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일상에선 느낄 수 없는 시공간의 현기증을 스크린에 펼치는 것이다.
<지난 여름>은 <공원에서>보다 일반적 극영화의 양태를 띠고 있는 듯하면서도 역설적으로 더 기묘하게 고전적 데쿠파주를 탈피한다. <장손>이 한국 시골의 전통적인 대가족을 스크린에 투사한다면, <지난 여름>은 한국 시골의 탈역사적 풍경을 찍는 데 집중한다. 주인공 민우와 아버지, 할머니가 영화에 종종 등장하여 시골의 평범한 일상과 죽음을 담아내지만 기실 대개의 장면은 별 의미 없는 시골 주민들의 평평한 일상에 할애된다. 이들의 일상은 어떠한 사건을 촉발하지도 않고 서로에게 큰 영향을 주지도 않는다. 공간성 역시 독특하다. <지난 여름>의 공간들은 문을 매개하여도 각 공간의 안팎이 완전히 분리된 세계로 설정된다. 사람들이 각 공간의 경계(문)를 이동하는 이미지가 쉽사리 등장하지 않고, 혹여 누군가가 문으로 들어가더라도 그 인물의 행위는 그 안에서 연속되지 않고 금세 종료돼버린다. <공원에서>와 마찬가지로 이야기의 의도적 집합이나 연속이란 전통적 시퀀스 개념을 거부하고 모든 공간을 개별로 분화하여 영화의 고전적 데쿠파주를 해체한다.
통상적 극영화의 맥락에서 벗어난 <공원에서>와 <지난 여름>은 인간 기준의 보편적 지각을 넘어 세계의 존재 방식에 가까운 탈인간적 풍경을 그려낸다. <그녀에게> 등 앞서 살펴본 일련의 독립영화에서 우리 사회에 보편화되어야 할 주제와 관용의 필요를 발견할 수 있었다면, 극장 바깥의 몇몇 독립영화에선 그 사회 바깥에 흐르는 현상으로서의 세계를 곰곰이 살피는 사유에 도달하는 일이 가능해진다.
영화의 영토를 넓히는 새로운 가능성
<잠자리 구하기>
“일반적으로 헤테로토피아는 보통 서로 양립 불가능한, 양립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 여러 공간을 실제의 한 장소에 겹쳐놓는 데 그 원리가 있다.”(<헤테로토피아>, 미셸 푸코)
세계를 곰곰이 살피는 사유, 이것이 가능한 곳으로 미셸 푸코는 ‘헤테로토피아’란 개념을 제시했다. 가상의 이상적 공간인 유토피아와 달리 이상적이되 현실에 존재하는 반(反)공간을 뜻한다. 우리의 일상에 속하고 언제나 우리 주위에 있되 쉬이 지속될 수 없는, 하지만 그곳에 갈 수만 있다면 우리의 일상적 공간에 대한 신선한 사유를 얻을 수 있는 곳이다. 푸코가 예로 든 현대의 헤테로토피아는 극장이었다. 이차원의 공간에 삼차원의 공간을 영사함으로써 온갖 장소들이 혼재하는, 현실과 완연히 다른 감각을 제공하는 공간으로 극장이 기능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극장은 빛이 차단된 블랙박스다. 어두운 곳에선 밝은 곳을 볼 수 있지만 그 반대는 어렵다. 요컨대 <공원에서> <지난 여름>은 실제의 빛이 닿지 않는 깊은 동굴(영화)에서 바깥의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순수한 사유의 지대를 제공한 셈이다. 각 영화가 택한 공원과 시골이 영화관의 흥미로운 비유로 이해된다. 푸코가 “‘정원’은 세상 전체가 상징적 완벽성을 얻게 되는” 공간임을 주장한 것 역시 <공원에서>의 공간 선택과 즐겁게 공명한다.
영화의 헤테로토피아화는 작금 독립영화의 곳곳에서 발견되는 뚜렷한 경향이다. 극장이란 공간의 존재론이 위기에 처한 지금, 다수의 영화가 영화의 공간성을 고민하는 것이 우연은 아닐 테다. <잠자리 구하기>의 학교가 그렇다. 영화의 감독이자 주인공인 홍다예 감독은 고등학생 시절 입시 지옥을 선사했던 학교의 정경을 “차가운 포용력”이라 정의한다. 이처럼 모순적인, 말 그대로 이상적이되 현실에 존재하지 않을 듯한 수사는 무슨 의미인가. 학교란 헤테로토피아는 우리의 일상에 속해 있되 영화적 재현을 통해 숙의하여 그 이미지를 되새긴다면 무척 새로운 감상을 불러일으키는 곳이 된다. 학창 시절 겪었던 사회체제의 부조리한 구조를 재차 실감함과 동시에 이상하게도 그곳을 그리워하는 노스탤지어의 감정적 원천까지 이끌 수 있는 반(反)공간, 영화라는 이름의 이중적 헤테로토피아.
김이소 감독의 <나선의 연대기> 역시 화이트 큐브라는 전시관의 기본적 형태를 작품의 자장 안으로 끌어옴으로써 영화 공간의 헤테로토피아적 성질을 드러낸다. <나선의 연대기>는 2006년 일어난 평택 대추리의 농민 탄압 사건을 재현하려 여러 시도를 곁들이는데, 그중 하나는 당시 농민들의 항거 행위를 퍼포먼스적 몸짓으로 재현하는 일이다. 퍼포먼스는 벽면이 새하얀 어느 방에서 일어나고 주인공은 그들의 몸짓에 손전등의 빛을 투과하여 직시하게 된다. 화이트 큐브와 극장이란 블랙박스의 성질을 혼재함으로써 우리가 상상할 수 있고 갈 수도 있되 완연히 새로운 지대를 구현했다. 영화의 재현 가능성을 더욱더 넓힐 수 있는 여지를 펼쳐낸 셈이다. 다시, 어둠 속에서 바라보는 빛. 영화매체와 극장이 그 외연의 경계를 잃어가는 작금에 외려 영화의 영토를 넓힐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이 여기 있다.
개봉 제도 바깥에서의 발견
<나선의 연대기>
일일이 나열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영화적 시도, 특히 형식적인 실험의 장은 극장 바깥의 독립영화에서 활발히 펼쳐지고 있다. 서두에 언급한 200편의 영화 중 개봉뿐 아니라 영화제라는 제도에서 탈락한 영화의 수까지 고려한다면 우리가 놓치는 영화는 더욱 많을 것이다. 습관처럼 회고되는 과거 독립영화의 생기라든지 힘이라든지 특별함, 사유의 깊이 등은 어쩌면 개봉이라고 부르든 제도라고 부르든 현재의 시스템에서 받아들여지는 데 실패했을 뿐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독립영화의 다양성이란 테제와 그것을 둘러싼 정책적 기준은 기획서 단계의 소재, 주제, 서사뿐 아니라 텍스트로 모두 설명하기 어려운 형식미를 포괄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지금 한국의 독립영화, 영화산업의 개봉 제도는 피칭부터 제작 지원, 개봉지원에 이르는 일련의 ‘텍스트적 검증’에 의존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독립영화의 영토가 제한되는 과정을 거쳐야 관객을 만날 수 있는 시스템하에 우리가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를 감추기 어렵다. 그럼에도 전술한 <공원에서> <나선의 연대기>는 오는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잠자리 구하기>는 현재 각지의 독립영화관에서 만날 수 있다. 조금만 눈을 돌리면 관객을 기다리는 독립영화가 있다. 그 지평으로 향하는 문을 열면 당신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기다려왔던 열린 감각의 시공간(들)을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