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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펜하이머' 소환한 천재감독 크리스토퍼 놀란, 찬사가 아깝지 않다
来源:3377TV人气:819更新:2024-05-16 12:29:39
[리뷰] 원자폭탄 아버지 '오펜하이머' 일대기 그린 <오펜하이머>▲ 크리스토퍼 놀란의 역작 ‘오펜하이머’ⓒ 유니버설 픽쳐스
<배트맨 리부트> 3부작, <인셉션> <인터스텔라> <됭케르크> <테넷> 등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는 역사와 사회, 물리학 등 모든 인문·자연과학의 영역을 자유롭게 넘나든다. 영화의 줄거리를 쉽사리 따라가기 어렵지만, 끝내 인간미와 온기를 잃지 않는다.
<인터스텔라>에서 기약 없이 우주로 떠난 아빠 쿠퍼는 오랜 성간여행(인터스텔라) 끝에 지구에 남겨둔 딸 머피의 곁으로 돌아오고, <인셉션>의 주인공 코브 역시 아내 살인혐의를 벗고 가장 먼저 아이들에게 다가간다.
놀란 감독의 신작 <오펜하이머> 역시 인간미가 넘쳐난다. 처음 영화관에서 보고 한 번만 보기에 아깝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 넷플릭스에 공개돼 'N차' 관람 기회를 얻었다. 이제야 이 영화를 주제로 리뷰를 쓸 수 있을 것 같다.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이른바 '맨해튼 프로젝트'라고 불린 핵무기 개발을 진두지휘한, 전설적인 과학자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오펜하이머는 전쟁 영웅으로 추앙 받았다. 미국 군부는 물론 시민들, 특히 전쟁터에 자식을 내보낸 부모들은 원자폭탄이 전쟁을 끝낸 일등공신이라는 데 아무런 이견이 없었다. 이토록 '귀한' 무기를 오펜하이머가 개발했으니, 전쟁 영웅으로 등극한 건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그러나 정작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이 가져올 파국적 상황을 우려했다. 그래서 구소련과 협력 체제를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원자폭탄 보다 더 강력한 수소폭탄 개발에도 반대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정치는 그의 바람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렀다.
미국과 소련은 첨예하게 대립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소련이 핵폭탄에 이어 수소폭탄 개발에 성공하면서 미국은 본격 군비경쟁에 뛰어든다.
한편 미국 국내에선 매카시즘 광풍이 몰아닥쳤다. 이때부터 오펜하이머의 명성은 급전직하하기 시작한다. 특히 미 군부와 보수주의 냉전주의자들은 오펜하이머가 수소폭탄 개발에 반대해 미국이 소련에 밀렸다며 오펜하이머를 마녀사냥하기 시작했다. 미국 원자력청은 아예 소련이 수소폭탄 개발에서 우위를 차지한 건 오펜하이머가 '반역적 태도'로 미국 정부에 엉터리 자문을 했다고 낙인찍었다.
핵폭탄의 아버지에서 일순간 반역자로 추락한 천재 물리학자의 처지는 그야말로 극적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이 주목한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오펜하이머를 영웅으로 미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냉전주의자들에게 조롱당하고 궁지에 몰린 모습을 더 극적으로 묘사한다.
이런 맥락에서 타이틀롤 오펜하이며 역에 킬리언 머피를 낙점한 건 그야말로 '신의 한 수'라고 본다. 킬리언 머피는 <배트맨 리부트> 이후 <인셉션> <됭케르크> 등 놀란 감독의 대표작에 꾸준히 출연했다.
킬리언 머피가 맡은 배역이 주연은 아니었지만 출연한 작품마다 강렬한 존재감을 뽐냈다. <배트맨 리부트> 시리즈의 스캐어 크로 역이 대표적이다. 최근엔 BBC 드라마 <피키 블라인더스>에서 복잡한 캐릭터를 가진 악당 토마스 셸비 역을 맡으며 다시금 특유의 '귀티' 넘치는 연기력을 뽐냈다.
킬리언 머피가 쌓아온 이력은 매카시즘 광풍에 휩쓸려 마녀사냥 당한 오펜하이머와 잘 겹친다. 실제 영화 속 킬리언 머피는 거의 매장면 얼굴을 내밀며 오펜하이머의 내면에서 요동치는 고뇌를 제대로 표현해 낸다. 이밖에 루이스 스트로스 제독 역의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대배우 케네스 브래너, 이어 맷 데이먼, 에밀리 블런트, 조쉬 하트넷, 라미 말렉 등 반가운 배우들도 잇달아 등장한다.
왜 오펜하이머인가?
▲ 오펜하이머 역을 맡은 배우 킬리언 머피는 매장면 얼굴을 비치며 오펜하이머의 내면을 그려낸다. ⓒ 유니버설 픽쳐스
이 영화는 올해 3월 열린 제96회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작품상, 감독상 등 7개 부문을 거머쥐었다. 작품성으로 보나 배우들의 연기로 보나 당연한 결과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플러스 알파'가 분명 존재한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지금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 대해 3년째 침략전쟁을 벌이는 중이다. 개전 초기부터 미국 등 국제사회는 침략행위를 중단하라는 압력을 넣고 있지만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모르쇠'로 일관 중이다. 오히려 핵무기 사용 가능성을 공공연히 흘리며 이 같은 압력을 일축했다.
'원자폭탄의 아버지' 오펜하이머는 핵무기가 가져올 파국적 결과를 모르지 않았다. 그런데도 원자폭탄 개발에 학문적 역량을 쏟아 부었다. 이유는 아돌프 히틀러였다. 오펜하이머는 히틀러가 먼저 원자폭탄을 수중에 넣어선 안된다는 절박함에 사로잡혔다. 이 같은 절박한 감정이 오펜하이머를 핵무기 개발로 인도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 러시아의 핵무기는 소련 제국의 부활을 꿈꾸며 침략전쟁을 벌인 푸틴의 손아귀에 있다. 오펜하이머가 가장 우려했던 상황이 무려 21세기에 현실이 된 것이다.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을 국제협력체의 관할 하에 두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이 같은 주장은 매카시 등 냉전주의자들을 격분시켰다. 이에 냉전주의자들은 오펜하이머를 파멸시키기로 뜻을 모은다. 그 선봉에 선 사람이 '아이언맨'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연기한 루이스 스트로스 제독이다.
먼저 미국 정부는 1953년 12월 오펜하이머의 '보안등급'을 낮춰 비밀문서 접근을 차단한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직접 통보했다고 전한다. 이러자 오펜하이머는 이의를 제기했고, 이에 보안등급을 심의하는 청문회가 열린다.
이때 루이스 스트로스는 검사 구실을 할 청문위원으로 변호사 로저 롭을 선임했고, 로저 롭은 과거 치부를 들추며 오펜하이머를 궁지에 몰아 넣는다. 하지만 오펜하이머는 악의적인 질문에도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는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자칫 무미건조하게 흐를 수 있는 로저 롭과 오펜하이머의 치열한 공방전을 긴박감 넘치게 그려낸다. 참으로 놀라운 솜씨다.
로저 롭 : 당신은 원폭 투하를 지지했죠?
오펜하이머 : 지지라뇨? 그게 무슨 뜻이죠?
로저 롭 : 타겟 설정에 관여했죠?
오펜하이머 : 제 일을 한 겁니다. 전 정책 결정자가 아니었어요. 정책을 따랐던 것입니다.
로저 롭 : 그럼 시키면 수소폭탄도 만들었겠군요
오펜하이머 : 전 못 만들....
로저 롭 : 그 질문이 아니잖아요. 소련 핵실험 후에 공동 작성한 합동 자문위 보고서엔 '수퍼' 개발을 반대했잖아요. 소련이 힘을 키우면 책임질 건가요?
오펜하이머 : 우리가 힘을 키우면 그들도 힘을 키울 수밖에 없죠. 원자폭탄 때 그랬듯이요.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 옛 소련이 수소폭탄 개발에 성공하자 맥카시 상원의원 등 냉전주의자들은 오펜하이머를 마녀사냥하기 시작한다. 그 선봉에선 인물이 루이스 스트로스 제독이다. 영화에선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스트로스 제독을 연기했다. ⓒ 유니버설 픽쳐스
지난 냉전 시기, 미국과 소련의 정책 결정자들은 핵무기가 가져올 파국적 결과를 알았고 그래서 핵무기 사용에 대해선 엄격히 자제했다. 물론 쿠바 미사일 위기 등 위기국면이 없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러나 21세기 국제정치 상황은 오히려 후퇴한 것 같다. 1980년대 레이건 행정부는 소련과 다시금 군비경쟁에 나섰다. 그러나 일순간 군비경쟁을 멈췄다. 미 ABC방송사가 제작한 TV 영화 <그 날 이후>가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이 영화는 핵전쟁이 몰고올 파장을 그렸는데, 이 영화는 공개 직후 전 세계적인 파장을 몰고 왔다. 레이건 대통령도 이 영화를 보고 불편함을 느껴 군비정책을 재고했다는 후문이다.
지금은 어떤가? 러시아 국영TV는 영국에 핵무기를 발사해 영국이 침몰하는 영상을 제작해 송출했다. 이 영상을 전하는 앵커의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냉전 시절이라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이렇게 국제정치가 후퇴한 데에는 미국의 책임이 적지 않다. 냉전 종식 이후 미국은 승리감에 도취한 기색이 역력했다. 2001년 9.11테러 이후엔 경찰국가를 자처하며 침략전쟁을 서슴지 않았다. '불량국가'에 대해선 핵무기 선제사용 가능성도 숨기지 않았다.
반면 러시아는 추락에 추락을 거듭했다. 이러자 정치인·시민 할 것 없이 민주주의가 오히려 자신들을 도탄에 빠뜨렸다고 믿기 시작했다. 옛 소련 정보국 KGB출신 블라디미르 푸틴도 이 중 한 사람이었다. 푸틴이 러시아 제국이란 환상을 조장하는 건 옛 소련 붕괴 이후 정치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만약 오펜하이머의 조언에 정책 결정자들이 귀를 기울였다면 역사는 어떤 방향으로 흘러갔을까?
역사에 만약은 없다. 하지만 적어도 오펜하이머의 조언에 귀기울였다면 적어도 인류가 자신을 파멸로 몰아넣을 무기를 이고 전전긍긍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침략전쟁을 벌인 푸틴이 핵무기를 카드로 쥐고 전 세계를 향해 협박을 벌이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오펜하이머는 그래서 반드시 소환해야 할 인물이었고, 놀란이 그 일을 해냈다.
영화 개봉 직후 물리학 영화란 평이 많았다. 하지만 이런 평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보다 이 영화는 정치영화다. 특히 핵 관련 정책을 다루는 정책결정자들이 지금이라도 꼭 봐야 하는 영화일 것이다.
덧붙이는 글 | 미주 한인매체 <뉴스M> 제 개인 브런치에 동시 송고합니다.
<배트맨 리부트> 3부작, <인셉션> <인터스텔라> <됭케르크> <테넷> 등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는 역사와 사회, 물리학 등 모든 인문·자연과학의 영역을 자유롭게 넘나든다. 영화의 줄거리를 쉽사리 따라가기 어렵지만, 끝내 인간미와 온기를 잃지 않는다.
<인터스텔라>에서 기약 없이 우주로 떠난 아빠 쿠퍼는 오랜 성간여행(인터스텔라) 끝에 지구에 남겨둔 딸 머피의 곁으로 돌아오고, <인셉션>의 주인공 코브 역시 아내 살인혐의를 벗고 가장 먼저 아이들에게 다가간다.
놀란 감독의 신작 <오펜하이머> 역시 인간미가 넘쳐난다. 처음 영화관에서 보고 한 번만 보기에 아깝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 넷플릭스에 공개돼 'N차' 관람 기회를 얻었다. 이제야 이 영화를 주제로 리뷰를 쓸 수 있을 것 같다.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이른바 '맨해튼 프로젝트'라고 불린 핵무기 개발을 진두지휘한, 전설적인 과학자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오펜하이머는 전쟁 영웅으로 추앙 받았다. 미국 군부는 물론 시민들, 특히 전쟁터에 자식을 내보낸 부모들은 원자폭탄이 전쟁을 끝낸 일등공신이라는 데 아무런 이견이 없었다. 이토록 '귀한' 무기를 오펜하이머가 개발했으니, 전쟁 영웅으로 등극한 건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그러나 정작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이 가져올 파국적 상황을 우려했다. 그래서 구소련과 협력 체제를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원자폭탄 보다 더 강력한 수소폭탄 개발에도 반대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정치는 그의 바람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렀다.
미국과 소련은 첨예하게 대립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소련이 핵폭탄에 이어 수소폭탄 개발에 성공하면서 미국은 본격 군비경쟁에 뛰어든다.
한편 미국 국내에선 매카시즘 광풍이 몰아닥쳤다. 이때부터 오펜하이머의 명성은 급전직하하기 시작한다. 특히 미 군부와 보수주의 냉전주의자들은 오펜하이머가 수소폭탄 개발에 반대해 미국이 소련에 밀렸다며 오펜하이머를 마녀사냥하기 시작했다. 미국 원자력청은 아예 소련이 수소폭탄 개발에서 우위를 차지한 건 오펜하이머가 '반역적 태도'로 미국 정부에 엉터리 자문을 했다고 낙인찍었다.
핵폭탄의 아버지에서 일순간 반역자로 추락한 천재 물리학자의 처지는 그야말로 극적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이 주목한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오펜하이머를 영웅으로 미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냉전주의자들에게 조롱당하고 궁지에 몰린 모습을 더 극적으로 묘사한다.
이런 맥락에서 타이틀롤 오펜하이며 역에 킬리언 머피를 낙점한 건 그야말로 '신의 한 수'라고 본다. 킬리언 머피는 <배트맨 리부트> 이후 <인셉션> <됭케르크> 등 놀란 감독의 대표작에 꾸준히 출연했다.
킬리언 머피가 맡은 배역이 주연은 아니었지만 출연한 작품마다 강렬한 존재감을 뽐냈다. <배트맨 리부트> 시리즈의 스캐어 크로 역이 대표적이다. 최근엔 BBC 드라마 <피키 블라인더스>에서 복잡한 캐릭터를 가진 악당 토마스 셸비 역을 맡으며 다시금 특유의 '귀티' 넘치는 연기력을 뽐냈다.
킬리언 머피가 쌓아온 이력은 매카시즘 광풍에 휩쓸려 마녀사냥 당한 오펜하이머와 잘 겹친다. 실제 영화 속 킬리언 머피는 거의 매장면 얼굴을 내밀며 오펜하이머의 내면에서 요동치는 고뇌를 제대로 표현해 낸다. 이밖에 루이스 스트로스 제독 역의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대배우 케네스 브래너, 이어 맷 데이먼, 에밀리 블런트, 조쉬 하트넷, 라미 말렉 등 반가운 배우들도 잇달아 등장한다.
왜 오펜하이머인가?
▲ 오펜하이머 역을 맡은 배우 킬리언 머피는 매장면 얼굴을 비치며 오펜하이머의 내면을 그려낸다. ⓒ 유니버설 픽쳐스
이 영화는 올해 3월 열린 제96회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작품상, 감독상 등 7개 부문을 거머쥐었다. 작품성으로 보나 배우들의 연기로 보나 당연한 결과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플러스 알파'가 분명 존재한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지금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 대해 3년째 침략전쟁을 벌이는 중이다. 개전 초기부터 미국 등 국제사회는 침략행위를 중단하라는 압력을 넣고 있지만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모르쇠'로 일관 중이다. 오히려 핵무기 사용 가능성을 공공연히 흘리며 이 같은 압력을 일축했다.
'원자폭탄의 아버지' 오펜하이머는 핵무기가 가져올 파국적 결과를 모르지 않았다. 그런데도 원자폭탄 개발에 학문적 역량을 쏟아 부었다. 이유는 아돌프 히틀러였다. 오펜하이머는 히틀러가 먼저 원자폭탄을 수중에 넣어선 안된다는 절박함에 사로잡혔다. 이 같은 절박한 감정이 오펜하이머를 핵무기 개발로 인도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 러시아의 핵무기는 소련 제국의 부활을 꿈꾸며 침략전쟁을 벌인 푸틴의 손아귀에 있다. 오펜하이머가 가장 우려했던 상황이 무려 21세기에 현실이 된 것이다.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을 국제협력체의 관할 하에 두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이 같은 주장은 매카시 등 냉전주의자들을 격분시켰다. 이에 냉전주의자들은 오펜하이머를 파멸시키기로 뜻을 모은다. 그 선봉에 선 사람이 '아이언맨'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연기한 루이스 스트로스 제독이다.
먼저 미국 정부는 1953년 12월 오펜하이머의 '보안등급'을 낮춰 비밀문서 접근을 차단한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직접 통보했다고 전한다. 이러자 오펜하이머는 이의를 제기했고, 이에 보안등급을 심의하는 청문회가 열린다.
이때 루이스 스트로스는 검사 구실을 할 청문위원으로 변호사 로저 롭을 선임했고, 로저 롭은 과거 치부를 들추며 오펜하이머를 궁지에 몰아 넣는다. 하지만 오펜하이머는 악의적인 질문에도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는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자칫 무미건조하게 흐를 수 있는 로저 롭과 오펜하이머의 치열한 공방전을 긴박감 넘치게 그려낸다. 참으로 놀라운 솜씨다.
로저 롭 : 당신은 원폭 투하를 지지했죠?
오펜하이머 : 지지라뇨? 그게 무슨 뜻이죠?
로저 롭 : 타겟 설정에 관여했죠?
오펜하이머 : 제 일을 한 겁니다. 전 정책 결정자가 아니었어요. 정책을 따랐던 것입니다.
로저 롭 : 그럼 시키면 수소폭탄도 만들었겠군요
오펜하이머 : 전 못 만들....
로저 롭 : 그 질문이 아니잖아요. 소련 핵실험 후에 공동 작성한 합동 자문위 보고서엔 '수퍼' 개발을 반대했잖아요. 소련이 힘을 키우면 책임질 건가요?
오펜하이머 : 우리가 힘을 키우면 그들도 힘을 키울 수밖에 없죠. 원자폭탄 때 그랬듯이요.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 옛 소련이 수소폭탄 개발에 성공하자 맥카시 상원의원 등 냉전주의자들은 오펜하이머를 마녀사냥하기 시작한다. 그 선봉에선 인물이 루이스 스트로스 제독이다. 영화에선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스트로스 제독을 연기했다. ⓒ 유니버설 픽쳐스
지난 냉전 시기, 미국과 소련의 정책 결정자들은 핵무기가 가져올 파국적 결과를 알았고 그래서 핵무기 사용에 대해선 엄격히 자제했다. 물론 쿠바 미사일 위기 등 위기국면이 없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러나 21세기 국제정치 상황은 오히려 후퇴한 것 같다. 1980년대 레이건 행정부는 소련과 다시금 군비경쟁에 나섰다. 그러나 일순간 군비경쟁을 멈췄다. 미 ABC방송사가 제작한 TV 영화 <그 날 이후>가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이 영화는 핵전쟁이 몰고올 파장을 그렸는데, 이 영화는 공개 직후 전 세계적인 파장을 몰고 왔다. 레이건 대통령도 이 영화를 보고 불편함을 느껴 군비정책을 재고했다는 후문이다.
지금은 어떤가? 러시아 국영TV는 영국에 핵무기를 발사해 영국이 침몰하는 영상을 제작해 송출했다. 이 영상을 전하는 앵커의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냉전 시절이라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이렇게 국제정치가 후퇴한 데에는 미국의 책임이 적지 않다. 냉전 종식 이후 미국은 승리감에 도취한 기색이 역력했다. 2001년 9.11테러 이후엔 경찰국가를 자처하며 침략전쟁을 서슴지 않았다. '불량국가'에 대해선 핵무기 선제사용 가능성도 숨기지 않았다.
반면 러시아는 추락에 추락을 거듭했다. 이러자 정치인·시민 할 것 없이 민주주의가 오히려 자신들을 도탄에 빠뜨렸다고 믿기 시작했다. 옛 소련 정보국 KGB출신 블라디미르 푸틴도 이 중 한 사람이었다. 푸틴이 러시아 제국이란 환상을 조장하는 건 옛 소련 붕괴 이후 정치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만약 오펜하이머의 조언에 정책 결정자들이 귀를 기울였다면 역사는 어떤 방향으로 흘러갔을까?
역사에 만약은 없다. 하지만 적어도 오펜하이머의 조언에 귀기울였다면 적어도 인류가 자신을 파멸로 몰아넣을 무기를 이고 전전긍긍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침략전쟁을 벌인 푸틴이 핵무기를 카드로 쥐고 전 세계를 향해 협박을 벌이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오펜하이머는 그래서 반드시 소환해야 할 인물이었고, 놀란이 그 일을 해냈다.
영화 개봉 직후 물리학 영화란 평이 많았다. 하지만 이런 평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보다 이 영화는 정치영화다. 특히 핵 관련 정책을 다루는 정책결정자들이 지금이라도 꼭 봐야 하는 영화일 것이다.
덧붙이는 글 | 미주 한인매체 <뉴스M> 제 개인 브런치에 동시 송고합니다.